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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관부터 금동신발까지` 1500년 전 무덤에 묻힌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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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재 작성일20-09-0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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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황남동 120-2호분 매장주체부의 유물 노출 상태.사진제공=문화재청   
[경북신문=장성재기자] 경주 황남동 고분 발굴조사에서 피장자가 머리부터 발치까지 전신에 착장했던 금동관 등 6세기 전반에 제작된 장신구 일체가 발견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5월 27일 매장주체부(시신이 있는 자리)에서 금동신발과 금동 달개(영락) 일부가 확인됐던 경주 황남동 고분에서 추가로 진행된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금동관과 금드리개, 금귀걸이, 가슴걸이, 은허리띠, 은팔찌, 구슬팔찌, 은반지 등이 피장자가 착장한 상태 그대로 확인됐다.  
경주 황남동 120호분은 2018년 5월부터 문화재청과 경북도, 경주시가 함께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으로 발굴조사(조사기관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를 진행하고 있다.  
                      ↑↑ 경주 황남동 120호분 일원 전경.사진제공=문화재청   
이번에 피장자가 착장한 장신구가 대거 발굴된 곳은 황남동 120호분의 봉토를 파괴하고 축조된 120-2호분이다. 
피장자는 금동으로 만든 관을 머리 부분에 착장했고, 굵은고리귀걸이(태환이식)를 양쪽에 하고 있으며 금동신발을 신고 있었다.  
경주 지역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에서 피장자가 신발을 착장한 사례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관과 귀걸이, 가슴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신발이 일괄로 출토된 것은 1973년∼1975년 황남대총 이후 처음이다.  
                      ↑↑ 120-2호분 금귀걸이 주변 유물 노출 세부 모습.사진제공=문화재청   
금동 달개 일부가 지난 5월에 먼저 노출됐던 피장자의 머리 부분에서는 최종적으로 금동관이 확인됐다. 금동관은 가장 아래에 관테(머리에 관을 쓸 수 있도록 둥글게 만든 띠)가 있으며, 그 위에 3단의 나뭇가지모양 세움장식(수지형 입식) 3개와 사슴뿔모양 세움장식(녹각형 입식) 2개를 덧붙여 세운 형태이다. 금동관의 관테에 장식용 구멍이 뚫려있는 것은 첫 발굴 사례이다.  
관테에는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장식용 구멍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나뭇가지모양 세움장식의 끝 부분에도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다.  
                      ↑↑ 피장자가 착장하는 장신구의 종류와 위치.사진제공=문화재청   
금동관의 관테에는 곱은옥(곡옥)과 금구슬로 이루어진 금드리개(금제수식)가 양쪽에 달려 있다. 관테와 세움장식 사이에는 ‘ㅜ, ㅗ’ 모양의 무늬가 뚫린 투조판이 있는데, 세움장식의 상단에서도 투조판의 흔적이 일부 확인됐다.  
이 투조판이 관모인지, 금동관을 장식하기 위한 용도였는지는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투조판이 관모일 경우에는 경주지역 돌무지덧널무덤의 피장자가 관과 관모를 동시에 착장한 첫 사례이며, 투조판이 관을 장식한 용도일 경우에는 현재까지 출토된 사례가 없는 새로운 형태의 관으로 볼 수 있다. 
                      ↑↑ 경주 황남대총 북분의 장신구 노출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금동관 아래에서는 금으로 제작한 굵은고리귀걸이 1쌍과 남색 구슬을 4줄로 엮어 만든 가슴걸이(흉식)가 확인됐다. 
그 아래에서는 은허리띠와 허리띠의 양 끝부분에서 4점이 묶음을 이룬 은팔찌, 은반지도 확인됐다. 오른팔 팔찌 표면에서는 크기 1㎜ 내외의 노란색 구슬이 500점 넘게 출토돼 작은 구슬로 이루어진 구슬팔찌를 은팔찌와 함께 끼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은반지는 오른손에서 5점, 왼손에서는 1점이 출토되었는데, 왼손 부분을 완전히 노출시키기 않았기 때문에 추가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 왼손 부분에서 은반지가 더 출토될 가능성도 있으며, 천마총의 피장자처럼 각 손가락마다 반지를 꼈을 가능성도 있다.  
                      ↑↑ 120-2호분 금동신발 일부 노출 상태.사진제공=문화재청   
금동신발은 ‘ㅜ, ㅗ’ 모양의 무늬를 번갈아가며 뚫은 앞판과 달리 뒤판은 무늬를 새기지 않은 사각의 방형판으로 마감한 형태였다. 현재까지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관과 신발은 실생활에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죽은 이를 장사지내어 보내는 의례(장송 의례)를 위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동관의 중앙부에서 금동신발의 뒤꿈치까지의 길이가 176㎝인 것으로 보아 피장자의 키는 170㎝ 내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신라왕경사업추진단은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피장자의 성별 등을 포함해 추가로 더 밝힐 수 있는 것이 있는 지를 확인할 예정이다. 
이 외에도 은허리띠의 드리개 연결부가 삼각 모양인 점, 부장칸에서 출토된 철솥(철정)의 좌·우에 고리 자루 모양의 손잡이가 부착된 점 등 기존에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자료가 많아서 추후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면 다양한 논의가 더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장성재   blowpa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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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