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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들에게 길을 묻다] 발굴 현장에 몸 던진 고고학자 이구조, 중앙아시아 연구에 뛰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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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작성일21-01-07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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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구원장 김중순[경북신문=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구원장 김중순] 경북신문이 주최한 '2020 신라왕들의 축제'에서 열린 학술대회 '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에 참가한 학자들의 발표문을 연재한다. 신라왕들과 신라인의 창조적인 글로벌 의식과 혜안을 통해 코로나19 이후의 새롭게 전개될 세계를 적응하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한다.
 
  II. 연구의 초기 참여자들
 
  3. 이구조 (李九祚, 1922-2016)
 
  이구조의 삶에 대해서는 지난 2018년 경북대학교에서 열린 '이(가토)구조의 생애와 실크로드 유리·직물' 전시회 도록에 본인이 직접 쓴 '이구조 95년의 회상'에 자세히 나와있다. 이구조는 경북 칠곡군 약목면 출생으로 11세에 일본으로 이주를 했다. 그야말로 이국 땅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인간승리였다.
 
  1944년 일본군에 입대한 후 곧 종전을 맞았지만 만주에서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어 무려 4년 8개월간 시베리아에 억류를 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만들어 완벽한 러시아어를 습득하였다. 그리고 28세가 되던 1950년 다시 일본으로 귀환한 그는 上智대학 독문과에서 대학공부를 끝내고 1963년과 1964년에 처음으로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 여행을 하게 된다.
 
  여행을 마치고 펴낸 책이 '시베리아의 역사'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주목을 받았던 역작이었고, 이를 인연으로 일본의 국민작가로 불려지는 이노우에 야스시를 만나게 된다. 그와 함께 1965년과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서 투르키스탄과 시베리아 여행에 동행을 했다.
 
  이노우에 야스시는 '서역이야기'와 '오로시아국취몽담'을 발표했고, 이구조는 '소그드와 호레즘', 그리고 '서역의 祕寶를 찾아서'을 펴냈다. 1971년에는 '유라시아문명기행', 1974년에는 '시베리아에 홀린 사람들', 1980년에는 '시베리아記', 1995년에는 '중앙아시아역사群像'등을 연이어 펴냈다.
 
  그의 발굴작업은 1998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아무다리야 변에 있는 불교유적 카라테파에서 시작되었다. 탐사현장에서 흘린 땀은 많은 후원자들을 모을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1999년 나라현(奈郞縣)에서 현장스님의 서역 인도여행을 따라가는 단체 관광에 여행 해설자로 동행을 하고 '이구조의 카라테파 불교유적 발굴후원회'가 조직되어 12년간이나 발굴사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학문적인 여정에 대해서는 경북대 박천수 교수의 해설을 그대로 인용한다.
 
  선생님은 1945년 이래 소련군 포로시절 익힌 러시아어를 무기로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에 대한 끊임없는 현지 조사를 통하여 세계적인 실크로드 연구 학자로 인정받으셨다. 선생님의 업적은 저서 25권, 공저 20여권, 역서 30여권, 논문 100여편에 이르는 연구성과에서 잘 알 수 있다.
 
  선생님은 1989년 우즈베키스탄의 쿠산왕조 도성인 달베르진테페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개시하였으며,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하는 중앙아시아의 大河인 아무달리아변의 카라테파 유적을 10여년에 걸쳐 조사하였다. 선생님은 당시 미조사였던 카라테파 유적 북구릉에서 大塔, 3기의 小塔, 20m 四方의 中庭과 回廊 및 僧坊으로 구성된 僧院, 寺院의 구조를 밝혔다. 발굴조사에서는 벽감에 안치된 불상, 석가의 생애를 묘사한 부조, 보살, 공양자상, 탑과 승원을 장식한 건축 장식과 같은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선생님의 발굴조사에 의해 카라테파는 쿠산조시대 왕의 승원으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앙아시아 최대의 불교 유적임이 밝혀졌다.
 
  이구조는 앞의 두 사람과 달리 발굴 현장에 직접 몸을 던진 고고학자였다. 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일제 치하에서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결국은 자기실현을 이루어낸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아예 학문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시련의 길이었지만, 오히려 그 모든 과정이 그에게는 학문적 성취를 위한 준비 단계에 다름 아니었다.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는 그 과정마저 러시아어를 익히는 계기로 삼았고, 대학에서는 독일어를 전공했다. 그리고 1963년 이래로 소련을 무려 30여회나 다녀왔다.
 
  1965년에 아프랍시압 벽화를 벽화가 세상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현장을 견학하면서 본격적인 중앙아시아 연구에 뛰어들었다. 1918년부터 1991년까지 중앙아시아는 소련의 치하에 있으면서 아직 세상에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사이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여러 대학을 거쳐 국립민족학박물관 교수로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현장 연구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중앙아시아 일대를 미리 다녀본 경험을 배경으로 그는 심지어 관광안내자의 역할까지 자임했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그는 중앙아시아 연구를 위해 온 몸을 바친 개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로부터 그의 기여는 일찌감치 인정을 받았지만,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와 우즈베키스탄 과학아카데미로부터 각각 명예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발굴자로서 그의 기여는 국제적으로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러나 그의 수많은 연구논문과 저술들이 아직 국내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필요한 부분들이 번역이 되고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계속>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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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