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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 (3-3)] 고립서 벗어나 유라시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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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작성일21-01-21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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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경북신문=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북신문이 주최한 '2020 신라왕들의 축제'에서 열린 학술대회 '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에 참가한 학자들의 발표문을 연재한다. 신라왕들과 신라인의 창조적인 글로벌 의식과 혜안을 통해 코로나19 이후의 새롭게 전개될 세계를 적응하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한다.
 
  II. 경주의 자랑, 세계의 신비 :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어디서 왔을까-Ⅰ
   신라를 대표하는 경주 대릉원의 적석목곽분. 경주의 자랑인 동시에 유라시아 고대사의 최고 미스테리이다. 똑같이 생긴 고분들을 신라보다 앞서서 중앙아시아 일대의 기마민족들이 널리 사용했기 때문이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한번은 들어보았을 법한 이 문제를 두고 지난 100여년간 학자들은 논란을 벌여왔다. 서기 4세기경에 신라가 국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200여년간 만들고는 갑자기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신라의 고분과 똑같은 형태는 동아시아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적석목곽분과도 외형은 아주 유사하지만 자세히보면 차이도 많고 시간도 많이 차이가 난다. 천년을 이어온 신라인들의 역사에서 갑자기 200년간 끼어들은 적석목곽분의 시대를 한반도의 작은 틀을 벗고 1500년전 유라시아 초원의 역동적인 기마문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새롭게 다가온다.

-그들은 유라시아 초원에서 왔을까
   신라 왕족들이 사용했던 적석목곽분은 무덤방은 나무로 만든 통나무집같이 만들고(목곽) 그 위는 돌로 덮은(적석) 무덤(분)이라는 뜻이다. 무덤은 죽은 자를 위한 집이기 때문에 살던 집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땅을 파서 묻는 경우도 있고, 지상에 무덤방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위에 돌과 진흙을 사용해서 쌓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형인 황남대총은 높이가 25m이고 길이는 120m에 이른다.
    순수하게 손으로 작업을 해서 이렇게 산처럼 거대한 고분을 돌로 쌓고 또 그 고분이 1500년간 굳건히 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고대 신라인들에게 경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였던 고분을 유라시아의 고분들과 똑같이 만들었다는 것은 곧 스스로 초원의 유목문화와 닮고자 했던 신라의 바램이 숨어 있다.
   실제로 당시 신라의 사람들은 유라시아 초원과 다양하게 인적·물적으로 교류했다. 그 흔적은 계림로 황금보검과 유리그릇 들에 잘 남아있다. 죽은 자를 위한 마지막 정성으로 하다못해 무덤 안에 넣는 물건 하나 하나에도 다 사연이 있고 그들이 믿는 사후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고분은 쉽게 가져올 수 있는 귀중한 보물들과 달리 수천명이 동원되는 거대한 건축사업이다. 막연히 초원의 고분이 멋있다고 흉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로 만든 무덤방 위에 돌을 쌓는다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며, 무작정 돌을 수십미터 쌓으면 곧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신라인의 적석목곽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라 유라시아에서 무덤을 만드는 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웠을 것이다.
   더우기 경주는 적석목곽분을 만들기에도 적절한 장소였다. 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거대한 무덤을 만드는 재료들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중원(중국 중심의 평원지대)에는 이런 신라나 유라시아같은 돌무덤이 전혀 없다. 거대한 황하의 침식지로 돌을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나무가 귀한 몽골의 초원에서 살았던 2천년전의 흉노인들은 그나마 숲이 남아있는 계곡들 사이에 무덤을 만들었다. 경주 근처에는 숲도 많고 형산강 강가에 돌들도 아주 많으니 적석목곽분을 만들기엔 금상첨화였다.      그렇다면 기원찾기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은 '그래서 기원이 어딘데?'라고 묻는다. 비단 일반인뿐 아니라 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도 그런 질문을 자주한다. 정답은 아쉽게도 어디에서 왔는가는 아직 모른다.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유라시아에서 적석목곽분은 너무나 넓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라시아에서도 서부 시베리아를 제외한 중앙아시아 일대는 적석목곽분으로 덮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의 몇 배되는 지역에 적석목곽분이 있고 그리고 각 고분들의 구조도 서로 너무나 다양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지점을 찍어서 왔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지나가는 미국인의 얼굴을 보고 저 사람은 미국 어느 주에서 왔는지 맞추는 셈이다.
   또, 설사 어떤 유라시아의 유목민들이 신라에 내려와서 자신의 고향을 못 잊고 고분을 만들었다고 해도 지리와 환경의 차이로 똑같은 고분은 나올 수 없다. 비유컨대 한식당을 미국에서 연다고 생각해보자. 외견상으로는 한국건물을 흉내 낼 수는 있겠지만, 건축자재 하나하나가 한국과 똑같을 리가 없다. 현지에 맞게 재창조할 수밖에 없다. 
   단순하게 무덤의 생김새를 보고 기원을 찾는 것도, 또 신라인이 우연히 똑같은 고분을 만들었다고 우기는 것도 의미없다. 유라시아 적석목곽분을 만드는 방법을 신라인들이 받아들여서 경주에서 재창조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1500년을 변함없이 그 자리에 단단히 지키고 있는 거대한 돌무더기는 바로 유라시아의 기술을 받아들여 신라의 것으로 바꾼 신라인들의 지혜가 모여있는 집합체이다.
   그렇다면 이 적석목곽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 진정한 의미는 1500년전 서라벌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지금도 대릉원의 고분은 경주 벌판에서 너무나 눈에 잘 보인다. 과거 신라인들도 매일같이 고분과 함께 살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황남대총같은 대형 고분을 짓는다고 하면 수백 명의 사람이 수십년간 동원되어야 가능한 작업이다.
   경주의 신라인들은 매일같이 나무를 자르고 돌을 나르는 떠들썩한 공사를 보면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명절이 되면 거대한 제사와 축제가 이어지는 경쾌한 삶의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신라인들에게 왕족의 고분은 자신들을 드러내는 국가적 자존심이며 높이 산처럼 올라간 거대한 고분은 자랑거리였다. 서기 4세기경부터 신라는 가야 세력을 압박하고 고구려, 백제 등과 각축을 겨루면서 신흥 강자로 등장하였다. 물론, 신라는 표면적으로 고구려의 신민이었으며, 광개토대왕은 신라를 도와서 구원군을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교는 외교일 뿐이었다. 신라는 화랑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군사력을 키우고 초원지역의 기마술과 강력한 철제 무기들을 도입했다.
   국력을 키우는 신라인들에게 고분은 단순한 조상의 무덤 그 이상이었다. 바로 대내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신라의 고분은 왕의 궁궐 바로 근처에 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에서 고분까지는 직선거리로 4km나 된다. 백제의 수도 부여의 부소산성에서 능산리고분까지 2km나 된다.
   반면에 경주 월성에서 대릉원까지 직선거리는 500m도 되지 않는다. 신라 왕궁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자기들 옆에서 그 커다란 고분을 보면서 함께 살았다. 거대한 고분은 바로 신라인들의 정체성을 표방한 것이다. 한반도 끝자락에서 작게 살던 신라인들이 세상으로 뻗어가기 위한 마음을 다지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신라는 흉노의 후손임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했다. 문무왕릉비에서는 신라인을 흉노인 출신으로 한나라에서 활동했던 김일선의 후손을 자청했다. 부여계통을 자랑하며 국력을 자랑하던 백제나 고구려와 대항하며 그들은 또 다른 북방계인 흉노의 후손임을 내세웠다.  <계속>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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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