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칼럼] 마차가 말을 끌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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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태수 작성일21-01-25 19:45본문
↑↑ 시인 이태수찰스 다윈은 '살아남는 종(種)은 강하거나 머리가 좋기보다는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1859년 다윈이 '진화론(進化論)'을 펴면서 내세운 말이다.
이 논리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설득력을 유지할 뿐 아니라 되레 공감대를 넓히고 있다.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우주(지구)도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막강한 힘도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힘이 센 공룡은 세월이 흐르면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화석이 되고 뼈만 남게 된 지도 까마득하다.
그러나 크지 않고 힘이 세지도 않지만 유연성을 가진 생물들은 진화를 거듭하며 살아남았다. 그런 생물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번성하기도 한다. 이 같은 자연의 질서는 생물학적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도 그런 유연성과 함께 창의성(創意性)이 중요한 덕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창의성은 개인의 성취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력이 되고 추동력도 되어 준다. 그런 덕목을 갖춘 사람들이 큰 명성을 얻거나 천문학적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우를 적잖이 보아 왔다.
유연성과 열린 사고(思考)는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힘이 되고 있어 그런 소통(疏通) 능력이 오늘의 사회에서는 더욱 강조되고 있다. 옛날과 달리 요즘은 세상이 워낙 급격하고 가파르게 바뀌기 때문에 유연성과 적응력이 살아남고 진화하는 힘이 되게 마련이다. 세상살이에도 유연성이 중요한 덕목이다.
원칙과 기본이 끝까지 중시돼야 하지만, 그에 못잖게 유연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아집'이 아닌 '고집'이라도 악재를 부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한 시점에 고정하지 않고 유동적으로 바꾸는 '프로메테우스형' 인간들이 넘쳐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연성을 넘어 '임기응변'과 '얼굴 바꾸기'가 다반사인 적자(適者)들만 살아남는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되어 버릴까.
경제학자 슈워츠가 일깨웠듯이 '묻지 마 행렬'이 이어지고, 이들만 득세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진다. 게다가 수시로 변화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제쳐 버릴 수도 있다. 더불어 나아가며 살아가야 할 세상은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다.
리더십에는 소통, 설득, 통합이 중요한 덕목일 텐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 리더십은 실종되다시피 해버린 느낌이다.
오로지 '내 뜻대로'의 큰 힘만 작용하고, 그 힘 앞에 '프로메테우수형' 사람들과 '기회주의자'들이 눈앞의 이익만 좇는 '묻지 마 행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다간 유연성 실종이 부르는 악재에다 또 다르게 '임기응변' '얼굴 바꾸기' '살아남기용 줄서기'만 팽배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특히 정치 현실을 바라보면 소통 부재는 물론 생각이 다른 '남'을 적대시하는 한편 배려와 균형감각을 젖혀두고 아예 막무가내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보통사람들인 우리가 마차를 타고 있다면, 말이 마차를 끌고 달려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즘은 말이 마차를 제대로 끌고 가는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면 마차가 말을 끌고 가야 할까. 그런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더 나은 세상은 오지 않는다/꿈은 꿈으로, 기다림은 기다림으로/그 자리에만 주저앉아 있는 건지,/마차가 말을 끌듯이, 세상은/요지부동, 나아가지 않는다
몸부림쳐 봐도 거기가 거기고/되레 거꾸로 가는 것만 같다 ―자작시 '마차가 말을 끌 듯이' 부분
정치 지도자에게는 나름의 철학과 소신, 창의성과 카리스마를 가지되 남을 배려하고 포용하는 유연한 자세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리더십으로 마차를 끌고 달릴 수 있어야 한다.
'묻지 마 행렬'을 거느리기보다는 단호하게 그 행렬을 경계하는 미덕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마차의 바퀴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시인 이태수 kua348@naver.com
이 논리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설득력을 유지할 뿐 아니라 되레 공감대를 넓히고 있다.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우주(지구)도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막강한 힘도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힘이 센 공룡은 세월이 흐르면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화석이 되고 뼈만 남게 된 지도 까마득하다.
그러나 크지 않고 힘이 세지도 않지만 유연성을 가진 생물들은 진화를 거듭하며 살아남았다. 그런 생물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번성하기도 한다. 이 같은 자연의 질서는 생물학적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도 그런 유연성과 함께 창의성(創意性)이 중요한 덕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창의성은 개인의 성취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력이 되고 추동력도 되어 준다. 그런 덕목을 갖춘 사람들이 큰 명성을 얻거나 천문학적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우를 적잖이 보아 왔다.
유연성과 열린 사고(思考)는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힘이 되고 있어 그런 소통(疏通) 능력이 오늘의 사회에서는 더욱 강조되고 있다. 옛날과 달리 요즘은 세상이 워낙 급격하고 가파르게 바뀌기 때문에 유연성과 적응력이 살아남고 진화하는 힘이 되게 마련이다. 세상살이에도 유연성이 중요한 덕목이다.
원칙과 기본이 끝까지 중시돼야 하지만, 그에 못잖게 유연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아집'이 아닌 '고집'이라도 악재를 부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한 시점에 고정하지 않고 유동적으로 바꾸는 '프로메테우스형' 인간들이 넘쳐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연성을 넘어 '임기응변'과 '얼굴 바꾸기'가 다반사인 적자(適者)들만 살아남는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되어 버릴까.
경제학자 슈워츠가 일깨웠듯이 '묻지 마 행렬'이 이어지고, 이들만 득세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진다. 게다가 수시로 변화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제쳐 버릴 수도 있다. 더불어 나아가며 살아가야 할 세상은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다.
리더십에는 소통, 설득, 통합이 중요한 덕목일 텐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 리더십은 실종되다시피 해버린 느낌이다.
오로지 '내 뜻대로'의 큰 힘만 작용하고, 그 힘 앞에 '프로메테우수형' 사람들과 '기회주의자'들이 눈앞의 이익만 좇는 '묻지 마 행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다간 유연성 실종이 부르는 악재에다 또 다르게 '임기응변' '얼굴 바꾸기' '살아남기용 줄서기'만 팽배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특히 정치 현실을 바라보면 소통 부재는 물론 생각이 다른 '남'을 적대시하는 한편 배려와 균형감각을 젖혀두고 아예 막무가내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보통사람들인 우리가 마차를 타고 있다면, 말이 마차를 끌고 달려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즘은 말이 마차를 제대로 끌고 가는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면 마차가 말을 끌고 가야 할까. 그런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더 나은 세상은 오지 않는다/꿈은 꿈으로, 기다림은 기다림으로/그 자리에만 주저앉아 있는 건지,/마차가 말을 끌듯이, 세상은/요지부동, 나아가지 않는다
몸부림쳐 봐도 거기가 거기고/되레 거꾸로 가는 것만 같다 ―자작시 '마차가 말을 끌 듯이' 부분
정치 지도자에게는 나름의 철학과 소신, 창의성과 카리스마를 가지되 남을 배려하고 포용하는 유연한 자세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리더십으로 마차를 끌고 달릴 수 있어야 한다.
'묻지 마 행렬'을 거느리기보다는 단호하게 그 행렬을 경계하는 미덕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마차의 바퀴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시인 이태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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