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14. 해거리 행사 같은 외침과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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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3-22 19:15본문
↑↑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외침과 격퇴] : 신라국의 영토는 현재의 경상도 정도였지만, 백제국의 영토는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평안남도를 모두 합한 크기의 방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백제는 동쪽에 있는 조그만 신라, 조용하고 욕심이 없는 신라를 점유하여 영토를 더 넓히려는 야욕이 강하여 수시로 신라를 침공하거나 괴롭힌 기록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신라는 외침을 방어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우수한 전법 개발에 긴장을 놓아서는 안될 형편이었다. 신라가 외부로부터 침공을 받아 퇴치한 전쟁사를 신라 제10대 석내해왕의 치세 기간인 34년(서기196년~230년)분을 순서대로 정리해 본다.
서기199년(을묘년 왕4년)7월에 백제가 국경을 잠시 침범하였다고 하나 상세한 기록은 없다. 서기200년 왕은 알천(閼川)에서 군대의 일제 사열을 한 후, 중요한 무기와 군수품들을 일제히 점검하시었다.
서기202년(계미년 왕7년) 10월 말갈(靺鞨)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서기205년 2월에 진충(眞忠)을 일벌찬(一伐滄)으로 삼아 나라의 정치에 참여시켰다. 서기207년(정해년 왕12년) 정월에 왕자 이음(利音 혹은 나음<奈音>이라고도 한다)을 이벌찬(1등급 관직)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일을 겸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서기208년 4월에 왜인이 동해안 어촌을 침범하므로 이벌찬(1등급) 이음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쫓아 보냈다. 서기209년에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침입을 받은 가락국(駕洛國)의 요청으로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飡:1등급) 이음(利音) 등 구원병을 파견, 이들을 물리쳤는데 이때 팔국장군을 죽이고 포로 약 6,000명을 얻었다. 서기211년(신묘년 왕16년)정월 훤견(萱堅)을 이찬(2등급)으로 삼고 윤종(允宗)을 일길찬(7등급)으로 삼았다. 서기214년 7월 백제군사가 또 서쪽 요거성(지금의 상주)을 침공하여 성주 설부(城主 薛夫)를 죽이므로 왕은 이벌찬(1등급)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6천 명을 거느리고 나가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현성(沙峴城)도 수복하였다. 서기218년(무술년 왕23년) 7월 무기고에서 병기가 스스로 움직여 나왔는데, 백제 군사들이 또 장산성(獐山城)을 공격하므로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를 격파하여 도주시켰다. 서기220년(경자년 왕25년) 3월 이벌찬 이음이 죽으므로 충훤(忠萱)을 이벌찬(1등급)으로 삼아 병마사(兵馬使)를 겸하여 보게 하였다. 그 해 7월에 왕은 양산(지금의 경주)서쪽에서 대대적인 군사를 점검하고 사열하였다.
가을에 열병을 하는 것은 상례(常例)이다. 사기(史記)의 기록이 다소 불분명하나, 내해왕의 즉위 5년 9월에 알천에서 열병을 하였다고 한 후, 군사 열병 기록은 20년만에 처음 보인다. 그러나 기록에 보이든 안보이든 그 일은 끊임없이 이어졌을 것임은 다른 일의 예로 미루어 짐작된다. 서기222년(왕27년) 10월에 백제 군사가 우두주(牛頭州)에 침입하므로 이벌찬(1등급) 충훤(忠萱)이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막았는데, 웅곡(熊谷)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여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왔으므로 진주(鎭主)로 좌천시키고 연진(連珍)을 이벌찬으로 삼아 군사의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서기224년(갑신년 왕29년)7월 이벌찬 연진(連珍)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군과 봉산(烽山) 밑에서 싸워 이를 격파여 물리친 후, 8월에 봉산성을 더욱 튼튼하게 보강하여 축성하였다.
↑↑ 개축한 봉산성.
서기227년 파진찬(4등급) 강훤(康萱)을 이찬(2등급)으로 승진 임명했다.[왕의 붕어]서기230년(경술년 왕35년) 3월에 석내해왕이 만34년의 왕좌를 마감라고 붕어(崩御)하시었다. 석내해왕의 생시 유언에 따라 벌휴왕의 태손 석조분(助賁)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서기199년(을묘년 왕4년)7월에 백제가 국경을 잠시 침범하였다고 하나 상세한 기록은 없다. 서기200년 왕은 알천(閼川)에서 군대의 일제 사열을 한 후, 중요한 무기와 군수품들을 일제히 점검하시었다.
서기202년(계미년 왕7년) 10월 말갈(靺鞨)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서기205년 2월에 진충(眞忠)을 일벌찬(一伐滄)으로 삼아 나라의 정치에 참여시켰다. 서기207년(정해년 왕12년) 정월에 왕자 이음(利音 혹은 나음<奈音>이라고도 한다)을 이벌찬(1등급 관직)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일을 겸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서기208년 4월에 왜인이 동해안 어촌을 침범하므로 이벌찬(1등급) 이음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쫓아 보냈다. 서기209년에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침입을 받은 가락국(駕洛國)의 요청으로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飡:1등급) 이음(利音) 등 구원병을 파견, 이들을 물리쳤는데 이때 팔국장군을 죽이고 포로 약 6,000명을 얻었다. 서기211년(신묘년 왕16년)정월 훤견(萱堅)을 이찬(2등급)으로 삼고 윤종(允宗)을 일길찬(7등급)으로 삼았다. 서기214년 7월 백제군사가 또 서쪽 요거성(지금의 상주)을 침공하여 성주 설부(城主 薛夫)를 죽이므로 왕은 이벌찬(1등급)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6천 명을 거느리고 나가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현성(沙峴城)도 수복하였다. 서기218년(무술년 왕23년) 7월 무기고에서 병기가 스스로 움직여 나왔는데, 백제 군사들이 또 장산성(獐山城)을 공격하므로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를 격파하여 도주시켰다. 서기220년(경자년 왕25년) 3월 이벌찬 이음이 죽으므로 충훤(忠萱)을 이벌찬(1등급)으로 삼아 병마사(兵馬使)를 겸하여 보게 하였다. 그 해 7월에 왕은 양산(지금의 경주)서쪽에서 대대적인 군사를 점검하고 사열하였다.
가을에 열병을 하는 것은 상례(常例)이다. 사기(史記)의 기록이 다소 불분명하나, 내해왕의 즉위 5년 9월에 알천에서 열병을 하였다고 한 후, 군사 열병 기록은 20년만에 처음 보인다. 그러나 기록에 보이든 안보이든 그 일은 끊임없이 이어졌을 것임은 다른 일의 예로 미루어 짐작된다. 서기222년(왕27년) 10월에 백제 군사가 우두주(牛頭州)에 침입하므로 이벌찬(1등급) 충훤(忠萱)이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막았는데, 웅곡(熊谷)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여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왔으므로 진주(鎭主)로 좌천시키고 연진(連珍)을 이벌찬으로 삼아 군사의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서기224년(갑신년 왕29년)7월 이벌찬 연진(連珍)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군과 봉산(烽山) 밑에서 싸워 이를 격파여 물리친 후, 8월에 봉산성을 더욱 튼튼하게 보강하여 축성하였다.
↑↑ 개축한 봉산성.
서기227년 파진찬(4등급) 강훤(康萱)을 이찬(2등급)으로 승진 임명했다.[왕의 붕어]서기230년(경술년 왕35년) 3월에 석내해왕이 만34년의 왕좌를 마감라고 붕어(崩御)하시었다. 석내해왕의 생시 유언에 따라 벌휴왕의 태손 석조분(助賁)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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